포도의 죽음
2022.11.4. 송진숙
윤주의 전화를 받던 그 순간 몸이 굳는 것 같았다. ‘나의 저주 때문인가? 그럴 리가... 그렇게 빌고 빌었던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한오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머릿속이 하해졌다. 고등학교 시절 누구보다 잘 어울렸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한오가 졸업도 하기 전에 은행에 취업되고 교실에 남는 내가 ‘미자’가 되었을 때부터다.
세상은 온통 모순투성이고 모든 것들이 나를 배신한 듯했다.
은행 면접장에 섰을 때 만해도 그길로 당장 은행 뱃지를 단 남색 카디건이 내 것일 줄 알았다. 3년 동안 넷 중에서 성적이 가장 좋았던 내가 창구에 앉아있을 대상이라고. 그러나 면접관은 나를 배신했다. 그들이 서류만 뒤적일 때 알아차렸다. 시큰둥한 눈빛과 자기들끼리의 수근거림, 그 뒤로 은행의 면접은 잡히지 않았다. 대신 키가 한 뼘 더 크고 얼굴이 뽀얗고 호리호리한 한오가 은행 유니폼을 입게 되었을 때 절망했다.
절망의 시작은 중3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담임이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부모님과 통화한 뒤 아빠는 단호했고, 엄마는 내 눈치를 봤다.
“오빠가 대학을 가야지. 니가 인문계를 가면 3년 뒤에 넌 뭘 할거냐.”
“수영아... 아빠 말 들었지, 이 집구석에서 돈 버는 사람은 없고 죄다 돈 들어갈 궁리만 허먼 살림은 어떡허구, 너 돈벌어서 시집은 가야 헐 거 아녀.”
엄마는 나를 바로 보지 않고 걸레질을 하며 말했다.
“앞집 은민이는 상고 나와서 지금은 보험회사 영업점서 회계 본다더라. 착실히 벌어서 시집간다고 저축도 하고 집안에 도움도 되고, 아부지도 허리 좀 피고 살자.”
“지 앞길은 지가 쓸고 가야지...”
순간 ‘오빠는 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중3 담임은 아깝다는 말만 몇 번했을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다. 상고 나와서 은행 뱃지 달고 오빠보다 먼저 돈을 벌어 내가 오빠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배신을 했다. 부모님이 오빠에게 만 기회를 주었고 나를 배신했을 때보다 더 깊은 절망이었다.
그래서 세상이 망하길 빌었다. 모두 다 망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이 깊은 수렁에서 허욱적대는 기분을 당해보길 빌었다. 한오가 망하길 바란 것이 아니다.
한오의 장례식에 다녀온 며칠 뒤 몸살을 앓았다. 앓는 동안 나는 면접장에 다시 섰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면접관들이 나만 쳐다보며 연신 ‘인재’라며 미소를 지었다. 내 옆에는 단발머리의 누군가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말을 하자 면접관들은 서류만 뒤적이며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은행 뱃지를 벌써 내가 달고 있었던 것 같다. 순간 옆에 있던 단발머리가 나를 바라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한오였다. 아니 남이 장군이었다. 내가 너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남이 장군이 된 한오가 무서운 눈으로 질책하듯이 쳐다봤고,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이라고 다그쳤다.
고시원의 작은 잠자리에서 깨어났을 때 몸살은 조금 사라졌지만 여전히 기운을 차리기 어려웠다. 한오의 마지막 모습이 그려졌다. 아침 근무시작 전에 은행 탈의실 들어가 거기서 죽었다는 직장 동료의 이야기에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은행에 들어갔더라면 내가 죽었을까... 모두 망해버리라는 말이 한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나? 완벽하게 부인할 수 없었다. 백화점 판매 영업직 면접을 보면서 살을 빼기 위해 피운 담배가 다시 생각났다. 나와 맞지 않았던 그 일을 그만두고 9급 공무원 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몽땅 고시원 비용과 공무원 시험준비 교재를 사는데 섰다. 하지만 그 돈으로는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 작은 고시원 방만이 나에게 가장 편하고, 가장 두려운 곳이다. 영원히 이곳에 갇혀있어야 될까...
윤주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한오한테 다녀오자 했다. 윤주와 친구들을 만났을 때 어색했다. 한오가 떠난지 벌써 1년 지났고 죽음이란 게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을 한오 덕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꿈에 한오를, 아니 남이 장군을 만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윤주가 남이 장군 묘를 찾아보자고 했지만 찾지 못했다. 대신 포도밭 옆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작은 포도알이 까맣게 익어 마른 가지에 아직 붙어서 같이 말라가고 있었다. 손으로 눌러보니 단내가 풍기며 손가락 사이에 보랗빛이 물이 들었다. 끈적이는 포도 물이 피처럼 느껴졌다. 왈칵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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