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드라마 리뷰

영화 버닝 (존재를 태워버리다)

감독: 이창동(2018)

주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줄거리 : 내레이터 모델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해미는 배달 알바를 하는, 어릴 적 한동네에 살던 종수를 알아본다. 그날 둘은 술을 마시고 소소한 자신들의 일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해미는 곧 아프리카에 여행을 갈 것이며 종수에게 고양이 보일을 부탁한다. 해미가 떠난 동안 가끔씩 들러 고양이 보일을 챙기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종수는 동네 공무원에게 폭력을 휘둘러 재판에 넘겨진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고, 아버지 재판에 필요한 탄원서를 작성하고 동네 사람들을 만나 동의를 구하지만 별 효과가 없다.

해미의 귀국날 종수가 마중을 나간다. 반갑게 공항에 나간 종수는 그들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부잣집 청년 벤과 만난다. 해미는 벤을 중심으로 한 모임에 종수와 같이 참여하여 자신의 아프리카 여행을 이야기하고, 벤에 집에 초대된다. 어느 날 해미와 벤이 종수의 집에 놀러 온다. 같이 술을 마시며 벤이 가지고 있던 대마초를 나눠 피우던 해미는 갑자기 옷을 벗고 노을 아래서 춤을 추고, 해미가 잠든 사이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를 말한다. 그날 종수는 벤을 질투하여 해미의 행동을 탓하고 그 뒤 혜미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종수는 사리진 해미를 찾아다니고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그날 이후 벤이 불태운다는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닌다. 해미를 찾아 벤의 뒤를 쫓던 종수는 벤을 한적한 곳으로 불러내어 그를 살해하고 벤과 그의 차를 불태운다.

 

 

<감상>

영화에 너무 많은 은유가 숨어 있어서 일까. 솔직히 좋은 영화인지,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 봐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물 중심으로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몇 가지 이야기이다.

 

먼저, 해미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다. 나레이터 모델로 그날그날을 살며, 햇빛이 하루에 한 번만 들어오는 원룸에 살면서도 자신이 말하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꾼다. 보지 않는 처음부터 없다는 것을 잊고 귤을 맛보는 그녀는 처음부터 없었던 무엇을 갈구한다. 고양이 보일이도 원래 없었을 것이다. 해미는 자신의 말을 유일하게 믿어주는 종수를 좋아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벤도 좋아한다. 자신을 다 보여줄 수 있는 두 사람을 모두 거리낌 없이 좋아하는 존재다. 그것은 벤이 종수에게 하는 대화에서 드러났다. 해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좋수라는 것을. 그 해미가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진다.

해미의 말: *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춤, 리틀 헝거가 그레이트 헝가가 되는 춤

(노을 아래서 옷을 벗고 자유롭게 취해서 춤을 추는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영혼일 것이다.)

주인공 종수는 매우 불안정하다. 아버지의 재판으로 그는 집으로 들어온다. 아버지의 집에서 들려오는 대북 방송처럼 위험과 불안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처럼 늘 그의 공간에 머문다. 그의 마음속에 들어온 해미는 해미의 방 안에 들어오는 하루 한 번 찾아오는 반사된 햇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직접 비추는 햇살이라기보다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처럼 해미 자신의 여행과 삶 때문에 어느 날 우연히 들어온 밝고 따뜻한 햇살, 그러나 그 햇살을 길게 머물지 못한다. 결국 벤이 끼어들고 그 햇살마저 사라져 버린다.

종수는 분노한다. 아버지의 분노조절 장애처럼, 자신과 너무 다른 삶을 사는 벤을 보면서 자신 내면의 안의 페이스를 느
끼라는 그 말은 너무나 차원이 다른 데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또다른 벽이나 세상이다. 종수는 아직도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소설가이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아직도 머뭇거린다. 결국 해미가 벤의 호기심 거리가 되어 비닐하우스처럼 불태워졌다고 믿는 순간 그는 소설을 쓰는 것 같다. 해미가 없는 방에서. 마치 처음부터 해미가 없다는 것을 잊고 자위를 하는 자신의 행동처럼, 벤이 불태웠다는 비닐하우스도 원래 없었을지도 모른다. 

종수의 말: * 나는 아버지를 미워해요. 아버지는 분노 조절 장애가 있어요. 가슴속에 항상 분노가 있어서 폭탄처럼 터져요. 한번 터지면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져요.

* 나는 해미를 사랑해.

 

벤은 또 다른 세상이다. 악의와 선의가 모호한 그의 행동, 전혀 악의  없어 보이고 의도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흥미롭게 관찰하며 일하지 않고도 여유로운 그의 생활은 종수에게 막연한 불편을 느끼게 한다. 해미의 실종과 그가 모으는 여자들의 소품은 의심의 눈을 그에게로 향하게 한다. 포르셰를 타고, 강남에 자신의 집이 있고, 재미로 사람들을 만나고, 일요일에는 가족과 교회에 나가고 용산 참사를 예술화한 작품이 전시되는 식당에서 가족 모임을 갖는 모든 것이 다 갖춰진 그를 미행하는 종수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해미의 부재가 그의 은밀한 취미와 연관 짓게 된다. 그가 불사른 것은 해미라는 비닐하우스가 아닐까?

벤의 말: 나 자신이 나를 위해 재물을 만들고 그것을 먹어버리는 거지, 신들에게 재물을 받치듯

벤: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태우는 취미가 있어요.

 

영화평을 담은 내용을 찾아보면서 내가 놓쳤던 부분을 짚어주어 나의 생각도 같이 넣은 부분이 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해미가 종수의 집에서 노을 지는 먼 하늘을 배령으로 춤을 추는 장면이다. 그 저물어 가는 하늘 속에 원래 없었던 새를 표현하여 날렸고 끝부분에 다시 새들이 날아간다.

그리고 종수가 벤을 죽이는 장면이다. 종수는 벤을 아버지의 칼로 찌른다. 아버지의 분노가 폭발하듯이 자신의 분노를 담은 칼을 벤에게로 향하며 분노를 표한다. 같이 존재하지만 원래 없었던 것 처럼 몰랐던 그의 존재가 그 옆으로 와서 자신의 햇살 같았던 해미를 불사라 버렸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연기력이 모두 좋았다. 어려운 영화였지만 여러 장면이 오랫동안 생각나게 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