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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리뷰

현대 사회의 자화상 카프카의 변신

연극 카프카의 변신

 

극단 이구아구 연출: 정재호

출연 : 그레고르(이동건), 잠자-아버지(손성호), 잠자 부인(임은연), 그레마(조지영), 지배인(이일섭)

 

현대 사회 셀러리 맨의 비극을 감추지 않고 비유한 소설 카프카를 연극으로 관람했다. 소설 변신 을 처음 읽었을 때 무척 불편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기 때문이었고,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비슷한 사연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혐오스러운 한 마리 커다란 벌레가 되어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비정한 이야기였다. 벌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이 일었고 주인공의 변신을 연극에서 어떻게 표현할지 사뭇 궁금증이 일었다.

 

옷감을 파는 셀러리맨 그레고르가 잠에서 깬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하게 된다. 가족과 회사를 위해 헌신했던 그가 몸도 제대로 일으켜 걸을 수도 없고 말소리도 낼 수 없는 벌레가 된 것이다. 가족은 처음에 가장인 그레고르가 회사에 다시 출근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걱정했다. 그러나 회사는 결근한 그레고르를 해고한고 만다. 변신으로 예전처럼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가족은 점점 그를 혐오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더 이상 회사를 위해 일할 수 없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주지 못하는 그를 가족 마져 끔찍한 벌레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없어지자 가족은 그레고르가 마련한 집을 이용해 하숙으로 돈을 벌고자 했지만 그레고르가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하숙도 받을 수 없게 된다. 결국은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힌 그레고르는 상처가 번져 쓸쓸하게 죽는다.

소설 속에서 가족은 모두 매정했고 사회는 냉정하다 못해 끔찍했다. 그는 회사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돈을 벌어오는 기계였다. 아들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가족은 안락을 누렸고 회사는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의 희생을 당연히 여겼다. 경제적 능력을 잃고 벌레가 되자 그를 흉물스럽게 여기며 혐오하다가 죽음으로 몰아갔다. 심지어 집에서 벌레가 된 그가 죽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혐오스러운 벌레가 죽자 모두 과거의 불행을 씻고 전차를 타고 바람을 쐬러 가며 새출발을 다짐한다. 죽은 그레고르는 어떤 연민도 위로도 받지 못했다.

 

역시 연극은 책 속에 내가 가졌던 상상력을 깨뜨려 주어 더 흥미로웠다. 연극은 소설의 작품을 해석하기보다 충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레고르가 변신한 벌레를 어떻게 표현 할까 궁금했는데 분장 없이 연기로 보여주었다. 벌레가 되어 벽을 오르내리고 천정에 붙어 있는 모습을 정글짐처럼 꾸민 무대를 그레고르가 위 아래로 오르내리며 연기했다. 잠자 부인 역을 열연한 임은연씨의 연기는 훌륭했다. 아들에게 미안하지만 혐오스러운 아들의 죽음을 방조하는 그녀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모습과 아들에 대한 연민을 품은 그녀의 표정과 대사는 이중적이면서도 현실에 금새 적응하는 냉정함을 표현해 주었다. 아버지 잠자씨 역을 맡아 열연한 손성호씨의 연기도 멋졌다. 자신이 원하는 상황일 때만 가장인 그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너무나 냉정하고 못된 캐릭터를 잘 표현해 주었다.

단순하게 꾸민 무대는 신선했다. 무대는 끝가지 그레고르의 집이었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정글짐처럼 철골로 꾸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벌레 연기를 했다. 소품이나 기타 장치를 간소화 하여 식사 장면은 마임으로 표현했다. 대부분 배우의 연기력이 거의 전부처럼 보였다.

 

변신을 보고난 뒤 책을 읽었던 때보다는 덜 불편했다. 책으 통해 경험한 충격이 어느새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 모양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인간상의 내면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인간을 벌레로 만드는 세상, 쓸모의 여부에 따라 사람이 판단되는 계산된 인간관계, 일할 수 있는 기계로 보고 그 능력을 상실하면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무서운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회사는 사원이 왜, 얼마나 아픈지 묻지 않는다. 당연히 돈을 벌게 했으니 뼈를 깍고 살을 녹이며 일해야 한다. 경제적 능력을 잃고 가족에게 부담이 되는 구성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긴 병에 장사 없다고 한다. 일을 하다가 가족이 병이 나면 결국 가족들도 지쳐간다. 인간이 목적이 아나라 돈을벌어주는 수단으로 전략한 시대의 우울한 초상을 만나는 작품이다.

변신이 카프카가 프라하에서 소설을 썼던 시대와 지금이 많이 다를까? 물론 이후에 많은 제도나 법이 노동자나 근로하는 사람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돈을 벌어야 사람구실을 하는 사회의 모습이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이 작품이 지금까지 주목받는 이유가 될 것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는 인간이 소외된 사회의 자화상과 가족 간 혹은 직장 내에서 쓸모 있느냐 아니냐에 따른 차별적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와 인간의 잔인함이 냉점함이 당시와 비교해서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연극은 딸 예림이와 같이 관람했다. 엄마로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경험을 주고 싶었는데 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나중에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