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이 끌린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장석주 시집)

장석주의 시는 무겁고 어둡다.

무죄를 기다리며

                                             (장석주)

한 세월의 관 속에 누워 듣는다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져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판처럼 누워 있는 내 삶에 이끼들이 퍼렇게 돋는다

풀잎 끝에 노란 달들이 매달려 있고

지느러미를 날개처럼 퍼덕이는 물고기들이

무덤 위에서 잘 논다

 

하지만 그의 시는 생각이 머물게 하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삶의 무게를 진솔하게 말한다.

그래서 읽는 내내 장석주는 시를 쓰며 젊은 날의 시간의 고통을 쏟아내고 토해내는 구나 생각된다.

그리고 어느날 내가 어른이 되어 느끼는 삶의 무게를 그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검은 오버

(장석주)

검은 오버를 입고 산책길에 나선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며

나는 검은 오버가 무겁다고 느낀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의 죄가 아니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가 항상 너무 많은 말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 속에 수천 평의 추억들이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검은 오버는 번개다

검은 오버는 빈 들판이다

검은 오버는 컹컹 짖는 밤의 개다

검은 오버는 내 속에 질척거리는 진눈깨비 내려치는 길이다

검은 오버는 알 수 없는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던

청춘의 한때

증오의 대상이던 아버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