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과 토요일 가을 답사를 다녀왔다. 남녘으로 태풍이 지나며 논산에 비 소식이 있었지만 중간 지점인 공주까지 비 한줄기 내리지 않았다. 모처럼 나선 답사에 날씨가 호응을 해주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공주에서 1박을 하게 된 것은 답사지인 논산과 가깝다는 것과 숙소를 논산에서 찾기 어려웠던 탓이다. 가을이 되어 각 지방 축제가 한창인가 보다. 공주도 백제 문화 축제가 토요일부터 시작되어 금요일에 축포를 쏘아 올리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직장을 마치고 나서다 보니 도착한 시간이 야밤이라 회포를 풀어볼 겸 야간식당을 찾았다. 막걸리가 오가고 맥주잔을 몇 번 부딪치며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어수서한 세상 이야기를 했다.
다음날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인 선배들은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순댓국으로 해장을 하고 다시 논산으로 향했다. 비 소식은 거짓이 되었다. 해가 나기 시작하더니 가을볕이 만만치 않다. 선글라스 하나 정도는 챙겼어야 했는데 일기예보만 믿고 내려쬐는 햇볕 속을 걸어야 했다.
<윤증 고택>
답사 첫 코스는 소론의 영수인 윤증 선생의 고택이다. 답사를 이끌어 주신 민석규 선생님은 고택의 내력과 입지에 대해 지리적인 견해를 말씀해 주셨다. 조선 후기 정계를 주름잡던 노론과 소론의 정신적 뿌리는 논산이었다고 한다. 기호학파의 중심지였던 논산에는 10여 개의 서원이 있었다. 서울에 성균관이 국립대학의 역할을 했던데 비해 노론이 중심 서원인 돈암서원과 소론 세력의 노강서원은 지방에 자리한 명문 사립대학으로 중앙정부를 움직이는 실세들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두 서원은 훼손되지 않았다한다.
<돈암서원>
윤증 선생님 고택과 노강서원, 돈암서원을 차례로 답사하며 왜 이 지역이 사학의 핵심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민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이지역의 낮은 산들과 강이 만든 작은 평야는 당시 사람들의 기술 수준에서 개간과 풍수해를 관리가 가능한 적적 규모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들이 학식을 갖추려면 부모나 가문의 경제적 배경이 중요했고, 논산의 작은 강을 끼고 있는 들에서 나는 쌀과 곡식들이 학문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는 경제적 기반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고택과 서원을 둘러보고 강경에서 젓갈 정식을 먹었다.
마지막 코스는 강경포구다. 조선 말기에 3대 시장으로 불리던 강경은 가을볕에 벼가 익어가는 황금 들판을 가로지르는 금강 유역에 아담하게 자리한 도시다. 작은 도시에서는 과거 화려했던 명성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근대적인 교통수단이 사람과 물건을 빠르게 이동시키기 전, 서해의 높은 조차는 금강을 역류 시켜 강경을 지나 충청북도 부강(조치원, 청주근처)까지 서해 하구의 소금과 수산물을 내륙으로 밀어주었고, 강의 흐름을 따라 내륙의 상품이 하류로 전달되었다. 강경은 이런 상품들이 교환되는 핵심 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 철도가 놓여 그 길을 따라 사람과 물건이 스치듯 지나가면서 도시의 세력이 대전과 논산으로 옮겨가고, 시간이 더 지나 금강에 하굿둑이 생기면서 바다와 강이 먹여 살리던 강경의 영광을 소멸시켰다. 이제는 젓갈 시장만이 과거의 유산으로 남은 듯했다.
<강경-옥녀봉에서 내려다 보는 금강 유역>
답사를 마치며 민석규 선생님이 부러웠다. 자신의 살고 있는 지역에서 교직을 지켜오던 선생님은 올해 퇴임을 하셨다. 자신이 40년 가까이 그 고장에 살며, 그 지역의 공기와 먹거리를 얻고 그곳으로부터 자식을 기르고 인생의 흔적을 쌓은 장소를 애정 어린 말로 구석구석 설명해 주셨다. 나는 내가 사는 곳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다시 나에게 묻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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