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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마 리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쿠치 류스케, 일본, 2023]

난해한 이 영화가 찬사를 받으며 많은 상을 받았다. 영화의 의도나 내포하는 의미를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영화다. 이야기 전체 흐름은 단순하지만 결말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다소 충격적이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 전개와 달리 제목이 심오하다. 당황스러운 영화다. 영화에 대한 평단의 찬사나 영화제 출품과 관련한 이력을 알지 못했다면 이 어려운 영화에 나는 혹평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생각이 많아지게 만든 영화다.

영화 포스터

<줄거리>

긴 코로나에서 벗어난 하라사와 마을에 연예 기획사에서 최근 붐이 일고 있는 글램핑장을 착공하기 위해 마을 공청회를 연다. 충분한 기간의 안내가 없었음도 마을 주민들이 모여 회사가 제시한 개발 계획에 대해 예상되는 문제점과 글램핑장 설계상의 미비점에 대해 꼼꼼히 질의하며 개선된 제안을 가지고 다시 공청회를 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회사의 대응은 공청회조차 서류상의 형식을 갖추고자 할 뿐이며 진짜 의도는 코로나 보조금을 받아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주민과 자연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공사를 진행하려고 한다.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을 보내 마을 사람들을 회유하도록 지시하여 직원 두 명이 다시 마을에 방문하고 그날 이들은 맞이한 타쿠미의 딸 하나가 실종되어 같이 찾아 나서게 된다. 늦은 저녁(아니면 이른 새벽) 타쿠미와 동반한 타카하시는 총에 맞아 피할 수 없는 어린 사슴과 그 곁을 지키는 어미 사슴과 마주한 하나를 찾아낸다. 이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타쿠미는 딸을 구하는 대신 옆에 있던 다카하시를 죽이게 된다.

 

이게 무슨 영화일까?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내가 생각하게 된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첫 번째 질문] 타쿠미는 왜 타카하시를 죽였을까?

개연성 있게 진행되던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미궁 속으로 빠진다.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동행해준 타카하시(글랭핑장 개설 담당자)의 목을 타쿠미가 조른다. 타쿠미는 총에 맞아 도망치지 못하는 사슴과 그 사슴 곁에 같이 있는 다른 사슴 앞에 서 있는 하나를 구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를 구하려고 무작정 뛰어들려는 타카하시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입에 거품을 물고 얼굴이 발개져서 죽어가는 데도 정작 목을 조르고 있는 타쿠미의 얼굴에 표정이 없다. 왜 타카하시를 죽였나?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판단한다면 타쿠미를 사이코패스 정도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타쿠미는 동물의 극한 상황도 이해하는 인물이다. 하나와 숲을 거닐며 자연 하나하나를 소개할 때 그는 자연의 섭리를 아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따라서 그가 타카하시에게 가한 행위는 자연의 섭리를 이어가도록 하는 존재로 해석된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도록 하려는 무엇으로 생각된다.  제목과 비춰볼 때 타쿠미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에 해당된다.  결국 나쁜 행동이었지만 악한 의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결국 영화를 보던 나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되었다. 

타쿠미와 타카하시

 

[두 번째 질문]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영화가 말하려는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영화속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각 인물이 의미하는 것을 통해 영화의 뜻을 찾아 보자

 

하나-시종일관 사와가라의 마을의 자연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어린 그녀가 가는 곳을 카메라가 따라다니며 하라사와가 어떤 곳인지 보여준다. 아직 어린 그녀는 아빠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다. 돌봄 교실로 아빠가 데리러 오지 않는 시간에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가 지나간 장소들에는 사슴, 사슴이 물을 먹는 호수, 들판, 하늘의 새,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와 (), 사슴이 죽은 뼈, 새에게서 떨어진 깃털까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면 자연이 많은 것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는 죽는다. 사슴의 공격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이 발을 딛여 만든 결과가 하나을 죽게한다. 결국 인간으로 인해 자연이 파괴된다. 그녀의 상징은 하라사와의 자연이라고 생각된다. 

 

타쿠미- 글램핑장 건설에 ‘찬성도 반대도 아니다.’, 하라사와는 ‘외부인에 의해 개발되었고, 자연도 파괴되었다. 문제는 밸런스다’, 그는 마을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빨리 판단하지 않는다. 마을의 심부름센터의 역할을 하며 주어진 환경 안에서 그의 말처럼 밸런스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가 우동집에 물을 길어 나르는 심부할 때도 편리와 이익만을 고려하지 않는다. 수도 시설을 갖춰 깨끗한 물을 쉽고 원하는 만큼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대신 타쿠미는 불편을 감수하고 인간의 흔적을 최소화한 상태로 이용한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가 사슴 앞에 섰을 때 자연이 허용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던 그가 타카하시를 목졸라 죽인다. 그것도 자신의 딸 하나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보고도 먼저 구하기보다 생각없이 그 장면으로 달려드는 타카하시를 저지한다.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하는 일들에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힘이다. 

 

타카하시(연예 기획사의 글램핑 착공 담당자)- 현실에서 보는 가장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주어진 현재의 자신의 입장이 우선인 사람이다. 마을에 피해가 될 수 있는 개발 계획에 대해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자연의 생활에 깊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연의 삶 속에 사는 단순한 편익을 취하며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 역시 악한이 아니다. 주어진 자신의 생활을 이어가지만 자신의 행위가 어떤 행위가 될지 깊이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결국 하나를 찾았을 때 사슴앞에 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서 무조건 하나를 데려올 생각만 하다가 이를 저지하는 타쿠미에게 죽임을 당한다.

 

마유즈미(연예 기획사의 글램핑장 계획 추진의 담당자)는 타카하시와 비교되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외지인으로서 개발 예정지 주민의 반대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고 무리한 계획의 백지화를 회사에 건의하지만 묵살당한다. 지각이 있는 사람들이 노력하지만 결국 그 말은 힘이 없고 경제적 논리에 의해 묵살되고 마는 현실을 대변한다.

 

미네무라(우동집 운영자) 도쿄에서 이주하여 하라사와에 정착한 그녀와 남편은 마을에 자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외지인을 대표한다. 만일 외지인이 어떤 지역을 개발하더라도 그 지역과 균형을 맞추는 자세가 필요함을 대변한다.

 

이 외에 여러 인물들 자연을 개발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취하게 되는 각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다.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연예기획사 사장과 컨설팅 전문가이다. 이들은 개발로 인한 이익만 관심이 있으며, 주어진 조건을 형식적으로 뛰어넘으려고만 할 뿐 자연과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마을 회장 스루가의 말은 오랫동안 경험한 사람들의 지혜를 말하는 인물이다. 자연을 개발하여 인간이 살아가지만 상류의 문제는 하류로 이어지며 이때 신중하게 개발을 해야한다는 의미를 말한다.

 

[세 번째 질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영화에 대해 호평이 많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감독이 전하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자연이 하는 일에는 가치 판단이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결국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연결이 되었다. 일본의 자연 재해로 인해 후쿠시마 원전의 가동이 중단되었고 결국 오염수 방류가 이제는 이슈가 되지 못한다. 이런 입장에서 일본 전력이 취하는 입장이 이 영화로 해석될 때 누구의 잘못도 없다. 단지, 사고가 있었고 상류의 물이 오염되면 하류로 이어지듯 일본의 원전의 사고는 결국 인류 전체의 피해로 이어져 원망을 사고 있다는 마을 회장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좋은 영화로 호평이 자자한 반딧불이의 묘(타카하타 아사오, 일본)’가 한국에서 혹평을 받았던 것처럼 나에게 영화가 그렇게 다가왔다. 어쩌면 감독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만 도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일이 벌어졌음에도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 샘이다. 

 

삐딱하게 영화 비틀어보기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이며 생각할 거리는 많지만 나름대로의 결론으로 영화를 삐딱하게 보면 우려스러운 지점을 보인다. 만일 타쿠미의 행위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결론 짓는다면, 즉 어떤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다. 이 상황이 자연이 하는 행위는 모두 의도가 없으니 인간은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되는가를 의심하게 한다. 

후쿠시마 원전 문제로 시끌했던 여론이 묻혀가듯이 자연재해로 일어난 문제에 대해 그런 문제도 악은 존재하지 않으니 수용해야 하는 것이 될 것 같다. 상류의 행위가 하류의 문제가 되었지만 이를 알고도 방치하지 말라는 말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어쩔수 없다는 것인가를 되묻고 싶어진다. 즉 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책임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