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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아침에 꼬막을 손질하다가

 

어제 사온 꼬막을 씻었다. 사 올 때 크기가 작아 몇 번 망설이다 3개를 묶어 만원 한다고 해서 사 왔던 것이다. 그 녀석들의 묻은 갯벌 때를 솔로 닦으며 작은 그 꼬막들이 안쓰러웠다. 곧 죽을 운명이다. 갯벌에서 꼬물꼬물 기어 다닐 때 만해도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 정말로 물설고 공기도 설은 도시의 아파트에 와 있다. 어제 저녁 냉장고 안에서 보냈으니 겨울이라도 되었나 했을 것이고 랩에 싸여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TV를 켰다. 신은경이 주연을 했던 '노는 계집 창'이 나오고 있었다. 영화 채널들은 주말에 새벽 시간대에 19금 영화를 보여준다. 잠깐 보다가 말았다. 영화가 우울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그런 걸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영화 주인공은 강원도 시골 마을에서 올라와 윤락가에 몸이 팔렸고, 기둥서방에 낯선 남자들의 욕구를 채우는 일로 먹고 산다. 그 윤락가에 사는 여자들에 달라붙어 기생충처럼 사는 남자들과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출구가 없는 진창에 빠진 것과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감독이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꼬막을 씻고 있으니 그 꼬막이 영화 속 이야기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보인다. 출구가 없는 힘겨운 삶을 사람들은 지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 그것이 지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들이 상품이 된다는 것은 그것의 쓰임새가 생긴다는 말이다. 가끔 나는 나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날에는 세상이 나의 쓸모를 아직도 유효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 쓸모의 마지막이 자신을 없앰으로써 완성되는 꼬막이 안쓰럽게 생각된 이유는 그것이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으로 엮여서 이어진다니 꼬막의 쓰임이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자체로는 끝나는 삶이다.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소금을 녹여주었다. 그 작은 꼬막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있을 수 있을지 몰라서...

 

꼬막의 쓸모는 음식이었다.

내가 나의 쓸모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사고 방식이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을 상품화시키고 있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존재만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인가. 자신의 쓸모에 대해 그 존재감을 확인받는 것은 아닌가. 오늘도 모니터 앞에 앉아 뭔가를 하려는 나는 나의 쓸모를 생각한다. 이것이 한동안 숙제가 될 것 같다. 존재가 위대한 것일까? 그 존재의 쓸모가 위대한 것일까? 존재 만으로 쓸모가 생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나의 쓸모에서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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