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반딧불의 묘...
경기 독서토론에 올라온 글을 퍼 옮겼습니다.
반딧불의 묘(Grave of the Fireflies, 火垂るの墓, 1988 )
감독:다카하다 이사오(高畑勳), 원작:노사카 아키유키(野坂昭如)
<간추린 내용>
“소화 28년 9월21일 밤, 나는 죽었다.” <반딧불의 묘>는 (아마도)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내레이션을 관객에게 던지며 문을 연다. 죽어버린 유령이 자신이 죽음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관객에게 설명하는 진혼곡인 셈이다. 내레이션을 읊조리는 주인공은 평범한 소년 세이타. 그는 태평양 전쟁의 광풍에 휘말려 부모를 잃고 동생 세츠코와 함께 살아간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일본은 희망을 잃어버린 지옥도에 다름 아니고, 누구도 남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결국 굶어죽은 세츠코를 떠나보낸 세이타는 소화 28년 9월21일 밤에 죽는다. 주인공 세이타는 해군 함장의 아들이지만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전쟁이 언제 끝났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보통 일본인들의 초상이다.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빈번히 반대의사를 밝혀온 다카하다 이사오는 언제나처럼 보통 사람의 눈을 통해 전쟁의 흉포함을 고찰한다. 반전영화 <반딧불의 묘>가 종종 일본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강변하는 작품이라는 괜한 오해를 받는것도 이처럼 세밀하고 미시적인 다카하다식의 접근법 때문일 것이다.
<읽기자료2-반딧불의 묘는 일본인들의 반성없는 반전영화인가?>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반딧불의 묘>를 처음 접한 이들 중 상당수는 이 작품이 비록 눈물이 쏙 빠질만큼 감동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영 캥긴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일본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는 '나카자와 케이지'의 <맨발의 겐>을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다. 모두 10권의 만화책으로 국내에도 나와 있다. 그런 이들에게 <맨발의 겐>은 불평의 여지가 거의 없을 것이다. <맨발의 겐>은 그 자체로도 매우 감동적이지만 <반딧불의 묘>에 비해 일본의 반성이란 면에서 보다 확실히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딧불의 묘>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그런 지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좀더 심하게 말해서 나는 <반딧불의 묘>를 보면서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이들에 반대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그런 공격성의 배후에 숨겨진 극우적 심성이 오히려 두렵기 까지 하다. 나는 <반딧불의 묘>를 보면서 이 작품이 왜 이토록 '죽음'에 대해 담담할까? 를 고민했다.
일본의 저명한 '나오키 문학상'을 받은 <반딧불의 묘>는 원작자 '노사카 아키유키'의 실제 전쟁 체험을 바탕에 두고 쓰여졌다. 그는 이 불쌍한 오누이의 죽음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냉정하고,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주요 책임국가로서 일본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 아직까지 피해자가 생존해 있는 '태평양전쟁'이라는 민감한 역사적 소재를 다룬 일본 영화는 좀처럼 보기 드물었다. 더군다나 애니메이션에서 다뤄지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반딧불의 묘>에서 감독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듯 관찰자의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전쟁 장면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초반부에 등장하는 미군의 공습이 전부다. 그 이후엔 열 네 살 짜리 소년과 네 살 짜리 소녀가 전쟁 통에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같은 시기에 <이웃 마을의 토토로>를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 일본의 원형질, 이웃이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족처럼 지내는 농촌 공동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을 때, 다카하다 이사오는 전쟁 중에 어머니를 잃고, 이웃의 무관심 속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는 남매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비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친척집에서 쫓겨나고 방공호에서 살며 굶주림에 시달리다 세츠코를 업고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진단만 내려줄 뿐 이들 남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세츠코가 죽은 뒤 삶의 의지를 잃은 세이타에게 전후의 일본 사람들은 그저 살기에 바쁠 뿐 이웃의 세이타에겐 무관심하다. 결국 세이타는 산노미야 역의 기둥에 기댄채 죽어간다. 그렇게 죽어가는 세이타 옆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미군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걱정하며 지나갈 뿐이고, 역무원은 시체가 하나 더 늘어났다고 귀찮아 한다. 다카하다는 능수능란한 카메라 워크를 보여주지도 않고,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세이타의 입장에 섣부르게 자신을 동화시키도록 하지 않는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관객들이 세이타의 입장에 자신을 동화시켜 관찰자의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막는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전쟁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전쟁에 대해 말하고, 느끼도록 만든다.
세이타와 세츠코는 일본 제국 해군 대위의 가족이고, 세이타는 죽을 때까지도 전쟁이 끝났는지 일본이 승리했는지, 패전했는지 알지 못했다. 세이타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의 일본 국민들 대개가 그랬다.
몰랐으므로 그들은 죄가 없는 것이었을까? 다카하다 이사오는 관객들에게 그것을 묻는다.
반딧불의 묘와 전쟁
다카하다 이사오는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반딧불의 묘>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반성하지 않고, 전쟁의 피해자로서 그려지는 듯 하다는 지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밝혔다.
그는 "한국인들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반딧불의 묘>는 결코 일본을 정당화하려했던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한 것이지, 거기에 특별한 의도를 부여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답했다.
다카하다 감독은 이에 덧붙여 "원인부터 따지지 않으면 전쟁에 반대할 수가 없다. 어째서 전쟁을 피하지 못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작품을 만든 후 언론매체 등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말해왔다"고 했다.
그는 전시의 공습을 경험한 자신의 체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공습의 실상이란 어떤 것인지를 경험자로서 표현해보고 싶었다. 공습이란 흔히 만화에 나타나는 것처럼 쾅쾅거리거나 박력있는게 아니라,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쏟아져내려서 조용히 불타버리는 아주 이상한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공습은 <반딧불의 묘>에서 그렇게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진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가리켜 '심정적 좌파'라고 하는데, 토에이 동화 시절 그의 선배로 노동조합 활동에 그를 끌어들인 사람이 다카하다 이사오였다. 다카하다 감독은 일본의 우경화와 자위대파견법 제정 등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사를 밝혔고, 일본이 세계에 공헌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군사력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 헌신해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딧불의 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원래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마을의 토토로>와 함께 동시상영작으로 개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카하타 감독은 오랜 동안 리얼리즘에 기초를 둔 애니메이션 작가로 알려져 왔다. 그는 <엄마찾아 삼만리>를 제작하면서 이미 왕방울 같은 눈을 굴리며 어른들에게 투정이나 부리는 어린이가 아니라 자아를 지닌 한 명의 인격체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가는 어린이를 그려왔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감독은 과거 폐허가 된 일본과는 다른 발전된 일본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전쟁은 누구의 책임인가?
인류는 언제나 전쟁에 반대하다고 말하면서 어째서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가?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이들, 아니 전쟁과는 무관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어야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즐거운 나의 집"을 들으며 살아간다. 전쟁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란 극한 상황이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이기적인 속성,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내게 만든다. 우리는 전쟁이란 잔인한 게임을 통해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을 죽이고, 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번영을 누려간다.
다카하다 이사오는 결코 일본이 피해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이 어린 오누이조차 전쟁의 일부로 그리고 있다. 그들에게도 죄가 있다. 물론 그 죄란 일본에서 태어난 죄다. 우리는 걸프전과 그 결과 경제 봉쇄된 이라크에서 죽었거나, 죽어가는 수없이 많은 어린이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도 죄가 있다. 그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들 오누이의 죄, 역시 불행히도 그들의 죽음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살아남은 일본인들은 뉘우쳐야 한다. 물론 반성 없는 일본에 대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 그 하릴없는 분노가 때로는 상대방의 죄과와 닮아가고 있음을 느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당신과 내가 일본을 너무나 증오해서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을 당연하게 여길 때, 이 지구상의 그 어느 곳에선가 전쟁의 위기는 그만큼 늘어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증오와 무관심이다. 우리 안에 깊숙이 감춰 둔 '증오의 무덤'을 파헤치는 흡혈귀의 망토엔 분명 '무관심'이란 저주가 적혀있을 것이라는.
"뭐야, 이거?" "그런 건 버려. 내다 버리라구."
역무원이 그것을 바깥으로 내던졌다. 달캉달캉 소리가 나는 그것, 세이타의 품 속에 있던 알사탕통을 역무원은 여름 잡초가 우거진 부근의 어둠 속으로 던졌다. 그것은 여동생 세츠코의 하얀 뼈였다. 뚜껑이 열린 통에서 하얀 가루가 쏟아지고, 그 속에서 작은 뼛조각 세 개가 굴러 나왔다. 그 소리에 풀 숲에 머물던 반딧불이 이삼십 마리리가 놀란 듯 부산스레 빛을 깜박이먀 날아다니다 흩어졌다.